<밥,꽃.양>을 보고 와서 잠못이루는 밤--이것은 말하게 해 줄 의무에 관한 영화다.
울산인권영화제에서 사전검열 문제로 논란에 휘말려 있는 영화, <밥.꽃.양>은, 간결하게 설명하자면 1998년부터 지금까지 지루하게 진행되고 있는 현대자동차 식당아줌마들의 정리해고 반대투쟁기이다.
이 투쟁에는, 지금까지의 노동운동에 대한 내 관념과 인식을 깨어버리는 참으로 중대한 요소가 들어있고, 그 요소들이 바로 지금 내 머릿속을 복잡하고 착잡하게 만들어 깊은 밤 한숨으로 지새우게 한다.
그 요소들은 다름 아닌, 심지어 노동자들마저도, 자기보다 약한 자들을 희생시켜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일에 아무런 주저함이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밥.꽃.양>에서 내가 본 노조 지도부는 그러했다.
이 영상보고서가 우리가 그동안 저도 모르게 또는 고의로 외면해 온 지독한 진실, 현대자동차 노조가 대변하는 우리 노동현장이 빠져 있는 불의의 늪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깨닫는 순간 나는 이 필름이 결코 상영되어서는 안될 금기필름이 되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근심에 싸인다.
1998년, 현대자동차는 IMF를 빙자하여 무려 1500여 명에 달하는 인원을 정리해고하겠노라고 통보하였고, 그리하여 노조원들의 길고 지루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 투쟁에는 대단히 특이한 모습이 보였으니, 어린아이들을 필두로 온 가족이 파업에 동참한 것이다. 정리해고가 사업주에겐 경영합리화의 한 손쉬운 방법일지라도 막상 노동자 자신에겐 온가족의 행복과 안녕이 달린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생존의 문제라는 것을 부각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그리하여 정리해고 인원을 277명으로 축소하는 데 성공한다.
277명.
최종협상 당시 투쟁대열에 남아 있던 아줌마들의 인원이 276명이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 숫자에 어떤 비밀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영화에는 277명과 관련된 숫자가 계속 되풀이되고 있는데, 그 숫자는 133과 144라는 조함으로 이루어진다.
노조 지도부는 회사측과 277명이란 인원에 동의하는 도장을 찍었고, 해고 대상 인원을 선별하는 과정에서 모두가 아줌마들인 식당직원들을 우선적으로 해고대상에 올렸다. 노조는 이 과정에서 식당을 노조가 회사로부터 인수받아 경영을 한다는 편법으로 식당 아줌마들을 정리해고 대상에 포함시키는 데 성공한다.
노조는 이 아줌마들을 이제는 회사것이 아니라 노조의 것이 된 식당에 그대로 근무시킴으로써 식당은 그대로 유지하고 정리해고 인원수도 충족시키는 거래를 한 셈이 된다. 이를 위해 노조는 아줌마들에게 여전히 노조원 자격을 주고 노동조합비를 거둠으로서 심리적 위안을 제공한다.
그런데, 여기서 미묘하고도 기이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리해고 반대 투쟁 과정에서 대부분 극빈가장들인 아줌마들 가운데 많은 수가 회유나 그밖의 사정으로 회사를 자진 퇴직함으로써 마지막 단계에서 144명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발생한 첫번째 문제는, 부족한 133명의 인원을 남자 노동자로 채우게 되었다는 점이며, 두번째 문제는, 144명이라는, 거의 절반으로 줄어든 인원에게 277명이 근무하던 똑같은 규모의 바로 그 식당일을 시켰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건, 회사 직영이 아닌 하청이란 명목하에 임금을 삭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33과 144. 남과 여로 나뉜 이 숫자의 운명은 오래지 않아 또 한번 갈린다.
133명, 이 미묘한 숫자는, 경기가 회복되고 회사가 정리해고된 인원을 복직시키면서 제시한 인원과 일치한다. 숫자의 마술일까? 아니면 어떤 은밀한 약속의 소산일까? 정리해고되었던 133명의 남성노동자들만이 복직을 하게 된 것도 우연일까? 아니면 예정된 수순이었을까?
되풀이되는 숫자들을 보며, 나는 가슴 가득 밀려오는 의혹과 두려움에 혼란을 느낀다.
이리하여 아줌마들의 복직투쟁이 다시 시작된다. 최소한, 노동조합 지도부가 회사측으로부터 이 144명의 아줌마들을 언젠가는 복직시켜주겠다는 약속이라도 받아달라는 아줌마들의 요구는, 회사의 귓전에 가기도 전에 바로 노조 지도부에 의해 거부되었다. 아줌마들은 마침내 단식투쟁을 결의하고, 한 명씩 한 명씩 몸져눕는다. 대부분의 아줌마 대표들이 병원에 실려가버린 바로 그날, 노조 집행부는 드디어 아줌마들과 협상하겠노라고 말하면서, 그러나 오후 2시까지는 타협안을 제출하라고 통보한다. 모두가 병원에 실려갔는데 2시까지 어떻게 안을 내느냐는 대표의 비통한 하소연에 노조 간부들의 얼굴은 비아냥과 멸시로 일그러진다. 더 이상 봐줄 수 없다. 두시를 넘기는 것은 불가하다는 그들의 발언에 마침내 의연하던 아줌마 대표는 울부짖고 만다.
이 영상보고서를 보는 동안 내내, 나는 북받쳐오는 울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 아줌마들의 비통한 심정이 내 살과 영혼을 파고 들어 놓아주지 않았거니와, 그 비통함의 바닥에는 이 땅에서 여자로, 그것도 가난한 여자로 살아간다는 일의 잔혹하고 비참한 진실이 놓여 있기 때문이었다.
아줌마들은 밥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밥은, 가족들을 위해 포플린 앞치마를 어여쁘게 두르고 지어내는 앙증맞은 밥이 아니다. 지름이 일미터가 넘는 압력솥에 삽으로 온몸을 던져 저어가며 국을 끓이고 밥과 반찬을 하고, 전쟁치르듯 배식을 하고, 손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로 설겆이를 하며, 틈틈이 교대교대로 식당 뒤켠 바닥에 주저앉아 자신들의 식사를 해결해야 하는 엄청난 노동이다. 새벽 한시에도 아줌마들의 노동은 계속된다. 야식 시간, 공장 전역에서 흡사 달리기 경주라도 하듯 있는 힘껏 뛰어 노동자들이 식당으로 몰려드는 광경은 기이하고 섬뜩한 느낌마저 준다.
한 여성은, 그러한 고통스런 노동 끝에 집으로 돌아가 다시 남편의 성적 요구에 시달리는 현실을 털어놓으며 울먹인다. 여자이기 때문에, 라고 말하는 그녀의 아픈 눈물 사이로 나는 나도 모르게 이 세상의 잔혹한 남자들을 향한 날선 분노가 심장을 휘젓고 사라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견딘다. 이 보고서의 전편에 녹아흐르는, 우리의 무의식 속에 감지되는 끝없는 여성에 대항 멸시와 조소, 차별들. 말하고 있는 여성의 마이크를 뺏아서 자기 말을 늘어놓는 노조 간부, 식당아줌마 대표가 발언한 동안 비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노조위원장과 노조집행부들, 그녀가 연설한 동안 끊임없이 일어나던 소란스런 잡음들, 아무도 진실로 귀기울이지 않았고, 아무도 진실로 그녀들을 염려하지 않았다. 그녀들이 낮고 낮은 여성들이었기에.
영화의 시작부분을 오래 점유하는 그녀가 남편이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며 이혼감이라고 하더라는 말을 전할 때 나는 그녀와 함게 울었고 그러한 그녀가 그래도 내 직장이기에 결코 포기하지 않겠노라 다짐할 때,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를 가만히 안았다. 형님요, 그렇지, 그렇게 하는 거요!!!
또 하나의 아픈 장면이 그 위에 오버랩된다. 소위 가족동반 투쟁이라는 새로운 투쟁의 한 복판, 시장통에 나가 벗겨버리는 채소들까지 얻어다가 삼시세때 밥을 해댄 아줌마들의 모습. 남자노동자들의 아내와 자식들이 지치지 말고 투쟁에 동참하라고, 몸과 수고를 아끼지 않고 따뜻하고 맛있는 밥을 만들어 먹이던 그녀들의 모성은 투쟁의 놀라운 성공이라는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 일등공신이지만, 그녀들이 한 일은 겨우 밥하는 일이었기에 단지 거름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 영상보고서의 제목은 <밥.꽃.양>이다. 밥하는 아줌마들이기에 천대받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리해고 반대투쟁을 성공으로 이끈 숨은 공신들, 투쟁이 낳은 꽃들, 그러나 마침내 희생의 제물로 바쳐진 무죄한 양이 된 그녀들.
이영화는 반드시 상영되어야만 하며, 우리는 모두 이 영화를 보아야만 한다. 우리가 모르고 저지르는 수많은 죄악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그러니, 저 갈라지고 쉬어 터진 목소리들을 듣는 것은 그들의 말할 권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인간됨을 위한 가장 시급한 의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