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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꽃양 이야기모임] '밥, 꽃, 양'이 내게 가하는 '고문'
저는 여성주의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여성주의적 문제의식에 별로 공감하지 않으며, '누구도 남을 억압하고 착취할 권리가 없다'는 한가지 기준으로 모든 문제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기준으로 보면 여성 차별, 인종 차별, 어린이에 대한 어른의 폭력 등 모든 소수자 문제가 명확히 보인다고 생각했으며, 지금도 기본적으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성 문제가 단지 많은 소수자 문제의 하나일 뿐이라는 제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가을부터입니다.

가을 어느 때인가 '운동사회내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라는 이름을 주목하게 됐습니다. 100인 위원회에 참여하면서 노동조합기업경영연구소에서 상근하는 연구원의 폭로 때문이었습니다. 노기연에서 이사로 있는 '존경받는 노동운동가'가 100인위의 활동을 비난하면서 노기연 관계자가 이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 명망가는 상근 연구원이 100인위 활동을 중단하지 않으면 자신이 이사를 그만두겠다고 압력까지 넣었다는 겁니다.

100인위는 당시 운동권내 성폭력 사건을 수집하고 있었고 아직 그 사건을 공개하기 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이 불거지면서 100인위는 때 이른 싸움에 휘말렸습니다. 한편으로는 노기연으로부터 '정치적 활동에 대한 탄압' 사과를 받기 위한 싸움을, 다른 한편으론 참세상 게시판에서 시작된 '좌파 남성'들의 공격에 대응해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좌파 남성 운동가들의 감춰진 모습을 확인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진보진영의 도덕성에 먹칠을 하는 의도가 뭐냐' '이런 방식이 운동의 발전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는 비난을 마구 쏟아냈습니다. 노기연 또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상근 연구원이 과잉반응을 했다거나, 내부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밖으로 가져가서 조직에 해를 끼쳤다거나, 100인위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노기연의 명예를 훼손했다거나 하면서, 100인위의 사과 요구를 묵살했습니다. 잇따른 성명서 발표, 항의방문에도 침묵과 무시로 일관하기가 얼마간 지속되고, 100인위는 11월22일 성명을 내고 패배를 선언했습니다.

그 성명은 이렇게 끝납니다. "우리는 이 패배를 어떻게 만회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피해자, 그리고 함께 싸운 이들과 같이 다시 싸울 수 있는 그 날까지 잊지 않을 것이다. 2000년 운동사회에서 김상복씨와 노기연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를."

"잊지 않겠다." 이 말은 그 이후 제 가슴에도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100인 위원회는 그해 12월11일 대표적인 성폭력 사례 10건을 공개합니다. 그 사례 가운데 제게 특히 충격을 준 것은, "아직도 순결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느냐"는 논리를 앞세워, 수많은 여성의 몸을 단지 자신의 더러운 욕망을 배설하는 도구로 삼은 어떤 이의 사례입니다.

두 사건을 계기로 전 여성 문제를 전혀 새롭게 보게 됐습니다. 여성의 제 목소리 내기가 좌파들에게는 한없이 '불온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며, 그 현실의 어두운 구석에서는 또 다른 남성들이 어떻게 자유주의적 이념으로 여성을 학대하고 억압하는지,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고 여성 문제는 제 시야에서 멀어졌습니다. 여성 문제가 다시 제게 다가온 것은, 올해 들어 모성보호 관련 법개정 논의가 활발해지면서부터 입니다. 여성노동계에서는 정부의 법 개정안이 모성보호를 신장하기는커녕 더 나쁘게 한다며 법 개정안 국회통과 저지를 위해 몸싸움까지 벌였습니다. 하지만 이 쟁점은 심지어 <한겨레신문>에서조차 별로 부각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떤 선배에게서 이런 말을 듣게 됐습니다. "산전, 산후 휴가 확대, 유급 육아휴직은 '잘 나가는' 전문직 여성들에게는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야간근로 허용, 생리휴가 폐지는 이들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문기자를 포함한 전문직 여성들은 생리휴가, 야근 등이 밑바닥의 여성 노동자들로선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다는 겁니다. 심지어 여성부 장관이 정부안에서 협공을 당하면서도 유급 육아휴직을 관철시키려고 애쓰고 있는데, 같은 여성들이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반대한다니 정신이 있는 거냐는 소리도 들린답니다.

이 때쯤, 이 시대 진보의 기준은 노동운동도, 그렇다고 탈이념 페미니즘도, 뭐도 아니라, 좌우의 이념에 치이는 여성, 그 여성 사이에서도 못 배우고 기술도 없어 소외당하는, 그래서 이 사회 온갖 모순의 하수구 신세를 면할 길이 없는 밑바닥 여성노동자에게 다가가, 그들과 하나가 될 수 있느냐 여부라는 믿음을 갖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 때까지도 제 머리로 짜집기한 관념적 여성노동자의 모습이, 현실로 튀어나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밥, 꽃, 양'은 그렇게 제게 다가왔고, '밥, 꽃, 양'이 가하는 고문은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입니다. 그것은 1년전의 고통스러운 패배를 다시 기억시켜주는 것이고, 1년전 잊고 말았던 그 말 한마디, "잊지 않겠다"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이제는 "잊지 않겠다"에 그칠 수 없습니다.

"잊지 않았다. 그래서 두번 지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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