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RNET 게시판 아카이브
maybbs 백업 데이터로 복원한 읽기 전용 정적 게시판 (2018-09-23 백업 기준)
보도자료
🏠 홈으로|전체 게시판 > 보도자료 > 게시글
[월간말11월호] 때로는 예술이 운동을 보안한다
제목없음

「밥 꽃 양」 사전검열논란: 때로는 예술이 운동을 보완한다 글/김규항 (칼럼니스트)

 

 

'밥'하는 아줌마들이기에 천대받은,

하지만 정리해고 반대투쟁의 '꽃'들,
그러나 마침내 희생의 제물로 바쳐진 '양'

다큐멘터리는 영화의 두가지 방식(극영화와 다큐맨터리) 가운데 하나를 넘어 매우 특별한 예술이다. 현실의 문제를 드러냄으로써 그 문제가 제거된 미래를 지시하는 다큐멘터리는 '진보적'이다. (대개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들처럼, 현재의 시스템에 봉사하는 다큐멘터리란 실은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빈 철저한 드라마다. 그것들은 관객에게 판단하게 하지 않고 관객을 몰아간다.) 현실이 존재하는 한, 다큐멘터리도 존재한다. 다큐멘터리는 단지 그 현실을 '기록'할 뿐 아니라 그 현실에 '진실'함으로써 다큐멘터리가 된다. 진정한 다큐멘터리는 그래서 늘 '독립적'이다.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역사(현재의 것들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진)는 1987년 김동원 감독의 「상계동올림픽」부터다. 천주교 계열에서 빈민운동을 하던 감독은 상계동 철거민들의 투쟁을 3년 넘게 기록했고 그 기록은 결국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새 장을 열었다. 현실 변혁의 의지에 가득 찬 당시 영화 청년들에게 「상계동올림픽」은 강력한 참고가 되었다. 게다가 「상계동올림픽」은 필름이 아니라 비디오(VHS)라는 간편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이내 집회와 시위 현장엔 비디오 카메라를 든 청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갓 제대한 나 역시 그런 청년들 가운데 하나였다.


<<약한 사람 돕는 게 사람된 도리 아닙니까>>

'라넷'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꽃 이름인가 했다. 그들이 보내 준 「밥 꽃 양」의 가편집 테이프를 보면서야 나는 그것이 'Labor Reporter's Network'이라는 강렬한 현실어의 약자임을 알았다. 이내 나는 라넷에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오늘 세상이 라넷의 이름이 지시하는 유형의 신념을 부당하게 경멸하는 천박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경멸에 분명히 반대하며, 그런 신념을 갖는 예술가들에 호감과 존경을 가진다.

「밥 꽃 양」은 라넷이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투쟁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진행 중인 '영상보고서'(영상보고서라는 이름엔 라넷이 이 작품을 완결하지 않고 계속 진행 중이라는 뜻도 포함된다)다.

영화는 농성중인 식당아줌마들로 시작한다.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은, 1997년 IMF와 1998년 이른바 김대중 정권의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진행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문제와 관련한 가장 상징적인 상황이었다. 김대중 정권은 당시 정부의 노사정위원장이던 김원기씨의 말대로 "현대자동차 문제가 여하히 해결되는가는 향후 노사 평화를 위한 시금석"이며 "원만히 타결된다면 노사문화의 새로운 시대를 열" 일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한 노동자가 말한다. "자본의 기계를 파괴해서라도 자본에 타격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리해고 전면반대를 내건 40여일 간의 총파업투쟁은 하부노동자들의 열망을 뒤로한 채, 김광식 노조위원장의 "노사가 상호신뢰 속에서 노사가 함께 살 수 있는 길"이라는 말로 종료된다. 중재에 나선 노무현씨가 득의양양한 얼굴로 남긴 "이번 타협을 계기로 해서 노동운동 노선의 수정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이라는 말은 그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잘 설명한다.

노조집행부는 277명 정리해고에 합의한다. 그 숫자는 공교롭게도 식당 노동자들(구내식당에서 밥하는 아줌마들, 물론 노조조합원인)의 숫자와 일치한다. 그 와중에 식당 노동자들 가운데 133명이 견디지 못하고 이탈한다. 노조는 식당 노동자 전원을 정리해고 명단에 포함시키는 대신 식당을 노조에서 하청 운영하는 안을 제시한다. 한 생산직 노동자가 말한다. "그럼 됩니까. 약한 사람 돕는 게 사람된 도리 아닙니까. 노동운동 그런 거 아닙니다."


<<인권영화제 본래의 정신을 회복하라>>

같은 노조원의 자격으로 같이 싸우던 식당 노동자들은 하청노동자로 추락한 채 똑같은 장소에서, 277명이 하던 노동을 144명이 하게 된다. 다른 조합원들이 천막을 걷고 작업장으로 돌아갈 때 아줌마들은 천막을 걷지 않고 긴 싸움을 시작한다. 경기가 회복되고, 정리해고되었던 생산직 노동자 133명은 전원 복직이 추진된다. 그러나 식당 노동자들의 복직 요구는 노동조합에서 거부된다. 영화 전반부에서 수염이 텁수룩한 채 정리해고 반대 고공농성 장면에 등장했던 노동자는 이제 말끔한 얼굴의 노조위원장이 되어 아줌마들을 조롱한다. "내가 사장도 아니고 회장도 아니고…" 아줌마들은 단식에 들어간다.

「밥 꽃 양」은 지난 7월, 10월 11일∼14일로 예정되어 있던 울산인권영화제에 초청되었다. 그러나 9월 초, 영화제 집행위는 "특정장면에 대한 외부의 문제제기가 있었다"는 이유로 "사전에 작품을 보고 상영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다. 이를 사전 검열 요구라 판단한 제작팀 라넷은 집행위측에 사전검열을 철회할 것을 요청했으나 집행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라넷은 "표현의 자유와 사전 검열 철폐를 위한 인권영화제 본래의 정신을 위배하는 사전 심의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상영거부 결정을 내린다. 논란이 가열되자 울산인권영화제 측은 웹사이트 게시판을 폐쇄하고, 며칠 후 행사 자체를 무기 연기한다.

라넷은 「밥 꽃 양」과 유사한 내용을 담은 자신들의 영화 「평행선」이 상영될 때마다 이루어졌던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압력과 고소고발 위협, 또한 한국여성연구소 주최의 「밥 꽃 양」 상영 후 현자노조의 협박성 전화, 제작과정 및 식당여성노동자들과의 영상토론회 등에서 행사한 창작자의 고유권한에 대한 침해 등, 반복적으로 위협과 압력을 행사한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공개적인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영화상영을 두려워 할 사람들은 누구인가>>

내가 본 「밥 꽃 양」 가편집본엔 식당아줌마들의 2001년 1월 단식투쟁까지 기록되어 있다. 2001년 6월 식당노동자들의 투쟁은 정점에 이르러, 삭발과 알몸 시위까지 이어지지만 그들의 요구는 여전히 외면되었다. 9월말 있었던 현대자동차 노조위원장 선거엔 4개 후보가 접전을 벌였고, 그 핵심 쟁점은 다름 아닌 '성과급'이었다. 그 일에서 우리는 「밥 꽃 양」 속의 비굴함을 쉽사리 유추할 수 있다. 그것은 노동운동이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반대하고 자신의 노동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위엄을 회복하는 운동임을 망각하고, 단지 자본가들이 쥐어주는 몇푼의 돈에 동냥아치처럼 매달리는 '경제주의'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 일을 '조심스럽고 민감한 사안'이라 말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울산인권영화제 집행위원회가 그랬듯,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겐 그렇게 말할 이유가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어린 아이 이상의 분별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이 문제는 '간단하고 분명한 사안'이다.
이 영화의 상영을 두려워 할 사람들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전혀 어렵지 않다. 한국 진보운동에서 노동운동이 차지하는 비중, 특히 현대자동차 같은 거대 사업장의 노조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큰 것이었고 앞으로도 얼마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세계 노동운동의 역사에 누누이 기록되었듯, 노동자에 의한 노동자 차별은 노동운동의 치명적인 환부다. 「밥 꽃 양」은 바로 그 지점을 적시하는 영화다. 때로는, 예술이 운동을 보완한다.


추신: 며칠 전 만난 한 독립다큐멘터리 감독은 "작품이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작품을 열심히 만드는 것만으론 부족하다"고 토로했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밥 꽃 양」 역시 작품 자체가 아니라 작품과 관련한 특별한 상황 덕에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유행'에 민감한 한국 인텔리들은 오늘 여전히 진지한 독립 다큐멘터리들이 생산되고 있으며, 작품의 질은 그것들이(그것들을 보는 일이) '유행'하던 시절보다 훨씬 높아졌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그 진지한 다큐멘터리들은 적어도 그 인텔리들이 오늘의 '유행'에 뒤지지 않으려 찾아보는 서방의 온갖 최신 텍스트들보다 훨씬 더 유익하다.

댓글 / 답글 (0)
등록된 댓글(답글)이 없습니다.
🏠 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