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진영이 '사전검열'을?
울산영화제 출품 현대자동차 식당 아줌마 해고반대 투쟁 담은 다큐 '밥.꽃.양' 불방
진보운동측 검열 논란으로 영화제 무산
노동운동권 내부 소수자 목소리 무시에 문화·노동계 비난여론 빗발쳐
지금 울산은 현대자동차 식당노동자 아줌마들의 정리해고 반대투쟁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밥.꽃.양' 한 편이 뜨거운
논란이다.
오는 10월 울산인권영화제에서 상영 예정이던 '여성노동자 영상보고서-밥.꽃.양'(이하 밥.꽃.양)이 영화제 주최측과
'사전검열' 논란이 불거지면서 영화제 자체가 무산되는 결과를 낳은 것. 지금 인터넷 게시판에는 이 사태를 두고 '표현의 자유와 사전검열',
'인권영화제의 기본 취지', '진보운동 속의 검열기제' 등의 문제가 부각되며 진보단체와 네티즌간 열띤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사태는 제2회 울산영화제 조직위원회 집행위에서 영화제에 상영하기로 되어 있는 작품인 '밥.꽃.양'을 사전에 볼 것을
요구하면서부터 시작됐다.
'밥.꽃.양'의 제작팀인 영상집단 라넷(LARNET)은 이러한 요구에 대해 "어떤 심의도 거부하는 것이 우리의
첫째 조건"이었다며, "상영결정 한달이 지난 상황에서 9월초 영화제 집행위가 출처도 명확히 밝히지 않은채 '특정장면에 대한 외부의 문제제기가
있었다'는 이유로 '사전에 작품을 보고 상영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밝힌 것은 명백한 사전검열이며 인권영화제의 기본 취지에 어긋나는 행위"라며
상영거부 의사를 밝혔다.
곧이어 영화제측은 게시판상에 "'밥.꽃.양' 작품에 대해 조직위 공식적으로 상영결정을 아직 확정한 바 없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상영작에 대해서 집행위의 입장이 있어야 하므로 검토 차원에서 상영전 한번 볼 수 없는가"하는 의도였다며 "우리는 밥.꽃.양에
대한 사전검열을 진행한 적이 없으며, 또한 표현의 자유도 침해한 적이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
집행위와 제작팀 사이의 논란
가운데, 이들은 상영결정이 됐었는가, 외부 문제제기가 있었는가, 사전검열인가, 아닌가 등의 문제에서 서로 사실관계에 대립하고 있고, 집행위측은
게시판을 통해 입장을 밝히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의견을 번복하고 있어 의혹을 더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 중에 영화제 조직위에
참여하고 있는 14개 단체 중 2개 단체가 조직위를 탈퇴했고, 집행위원장을 맡았던 김창원(울산인권연대 사무국장)씨가 사퇴를 선언했다. 또
조직위원회는 19일 이 문제에 대한 공개토론회를 제안했는데, 그 후 21일 갑자기 공식적인 설명 없이 영화제 사이트를 폐쇄해버렸고, 영화제
집행위의 주축이 됐던 울산인권연대는 공식 대외업무를 중단한 상태이다.
라넷의 서은주 감독은 "영화제 측에서 문제제기가
들어와 작품을 한번 봐야겠다고 했고, 우리는 작품을 그런 이유로 영화제 상영 이전에 상영할 수 없다며 일주일을 기다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문제제기 의혹들을 공론화하는 게시판상의 논란 과정에서 영화제측은 나중엔 아예 작품을 섭외한 적도 없다고 발뺌했고, 결국은 일언반구 없이
사이트를 일방적으로 폐쇄했다"고 털어놨다.
이번 사태는 표현의 자유와 검열반대, 인권을 부르짖는 진보진영안에서
'검열논란'이 일었다는데 더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영화제를 관심있게 지켜보던 주변인들은 이번 문제가 단순히 영화제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울산지역의 정치상황이 고려된 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라넷측이 심의 거부의 원칙을 철저히 고수하고 있는 것도 이전에도 '밥.꽃.양'과
비슷한 주제를 다뤘던 다큐멘터리 '평행선'이 현대자동차노조의 항의와 반발로 논란을 겪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영화
'밥.꽃.양'은 1998년부터 2000년까지 현대자동차 식당여성노동자들의 정리해고 반대투쟁과 회사와 노조를 상대로 한 원직복직 투쟁과정을 담고
있는 작품. 특히 이 작품은 정리해고를 둘러싼 이해관계 속에서 기존 노동운동의 관성과 폐해를 가감없이 담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집행위에서 문제삼았던 것은 영화 속의 한 장면이었다. "지난 98년 정리해고 당시 집회가 무산되는 과정에서 ###씨 발언 뒤 흥분한
사람들을 ***씨가 상황을 무마시키는 것으로 편집되었다"는 것.(집행위에 참여했다 탈퇴했던 '평등세상을 여는 울산 여성들'이 제시한 회의록
보고서 중 여성프로그래머들의 통화내용과 인권연대 사무차장의 발언 등에서)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두고 문제제기가 됐지만 그 안에는 노동운동의
권력화와 내부 소수자의 권리 무시 등 민감한 문제들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었다.
게시판에 한 네티즌이 올린 글은 이런
울산지역 노동운동 현장현실과 맞물린 이번 영화제의 특수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문제가 영화 '밥.꽃.양'에 제기된 문제로
에둘러졌지만 실은 울산을 예민하게 만든 문제의 실체를 봐야한다.
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철폐투쟁을 지금의 울산 지역 노동운동이 업보처럼 안고
사는 건 아닌지, 노조식당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 던지고 있는 복잡한 화두를 외면하는 건 아닌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한 집행위가 이 작품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모든 사람들의 문제제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 지나친 예민함은 문제 자체가
거론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한 과정에서 영화의 내용과 상영 자체에 문제제기를 한 것이 되었고, 그로 인해 그 작품은 사전 검열을 요구받았던
것이다. 이는 또 하나의 침묵의 카르텔이 아닐 수 없다." (게시판 중, '밥.꽃.양 사전 검열에 대하여 - 울산의 1998년, 그 침묵의
카르텔에 대하여' 조성은)
라넷의 서은주 감독은 "'밥.꽃.양'은 노동운동 안에서 식당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근원을 담고 있는 영화인데, 공교롭게도 울산 지역에서 지금 '밥.꽃.양'이 대접받고 있는 모습의 근원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다른
영화제도 아닌 인권영화제에서 작품의 인권(또 작품 속 사람들의 인권)을 누르는 모습을 보며, 지역의 인권 의식의 한계가 이것뿐임을 확인해
씁쓸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사실 진보진영내에서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그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다"고 토로하며, "우리 안의 검열, 우리
안의 파시즘이 공론화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현재 영화제측의 사이트 폐쇄에 항의해, 라넷은 '인권과 평화를 위한
검열영화제'라는 이름으로 사이트(larnet.jinbo.net)를 열고 논쟁이 이뤄졌던 게시판을 복구했으며, 이곳에서 문제의 작품
'밥.꽃.양'의 사이버 시사회를 열고 있다. <최문주 기자 cmjoo73@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