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급보류 위헌 판정 이후 영화계 이상 기류
'법제도 개혁' '행정 당국 및 언론 인식변화' 선결과제로 부상
안성배 기자 neteople@hanmail.net
헌법재판소의 등급분류보류 제도 위헌판정 이후 영화 표현의 자유가 오히려 위축되는 아이러니컬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여순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애기섬>이 <월간조선>과 <한나라당>의 몰상식한 이념공세로 위기에 몰렸는가 하면, 울산인권영화제에 출품한 영화 <밥·꽃·양>에 대해 주최측이 사전 심의를 하는 등 영화에 있어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저해하는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영화 <애기섬>은 <월간조선>이 정확한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채, 여순사건에 대한 그릇된 역사인식을 전제로 한 기사를 게재하는 바람에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됐다.
이 기사가 보도된 이후 논란이 증폭되고 있는 가운데 여수시가 '2010 세계박람회 유치'를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해 지급키로 한 제작지원비 2천만원을 지급보류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여수시는 "영화가 이적성 여부를 놓고 논란을 빚고 있는 데다 홍보효과에 대한 평가도 엇갈려 내용을 정밀검토한 뒤 지급여부를 결정키로 했다"고 밝혔다.
더구나, <애기섬>이 제작돼 온 과정에서 국방부 등 행정당국이 협조를 해주는 대가로 자진삭제와 수정 등을 요구조건으로 내세우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가위질 자국이 선명한 작품을 관객들에게 선봬야 하는 비극적 상황에서 이런 결정이 내려져 작품완성의 꿈을 접어야 할 상황이다.
감독으로서는 시 지원비를 타내기 위해서 또다시 시 행정당국의 입맛에 맞도록 자기검열을 한 후, 자진 수정 및 삭제를 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
결국, 작품의 주 내용인 여순사건에 대한 특정언론의 왜곡된 역사인식에다 영화미학에 대한 무지가 보태져 심혈을 기울여 제작해 온 영화 한 편이 허공으로 날아갈 위기에 처하고 만 것이다.
영화 <밥·꽃·양>에 대한 울산인권영화제 집행부의 사전검열 행위도 그 모양새는 다르지만, 영화에 대한 사전 검열을 통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행위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비슷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집행부의 사전검열 의지로 인해 완성된 영화 작품이 '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되지 못한 것이다. 충격적인 것은 현행법이 각종 영화제를 등급분류 제외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고, 사회적 소수자들의 인권문제를 다루는 영화제에서 이런 사태가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문화개혁을위한시민연대(공동대표 도정일)는 지난 18일 발표한 성명에서 "현대자동차 투쟁 과정에서 소외받고 배제된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운동 사회에서조차 또 다시 소외되고 배제되어 온 여성노동자들의 이중 억압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영화 <밥·꽃·양>에 대해 집행부가 사전심의를 한 것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는 물론이고, 철저히 정규직 남성 노동자의 이데올로기와 권력에 근거한 운동사회 내의 또 다른 자기 검열과 폭력임에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표현의 자유와 관련하여 법원의 진일보한 판결들이 진행되고, 이를 통해 시대착오적인 검열 행위의 불법성이 제도적으로도 입증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게 문화연대의 판단이다.
문화연대는 "특히 억압받는 소수자들의 목소리는 아직까지도 지배권력의 감시대상이며, 한국 사회의 문화적 보수성과 폐쇄성은 아직도 소수자들의 문화적 다양성을 결코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진보평론>도 이 사건을 "인권 장사치들의 몸부림"이라고 묘사하며, "이러한 행태 속에서는 아무리 진보를 외쳐도 외압과 청탁에 물든 낡은 정치를 벗어날 수 없다"고 진단했다.
이런 역설적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우선 등급분류보류 제도 위헌판결로 인한 사회적 역학관계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위기를 느낀 문화적 보수세력이 영화등급분류 보류제도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이념 공세와 정치적 외압 등을 무기로 삼아 영화 예술을 욕보이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원인은 사회 전반의 예술에 대한 인식이 아직은 낮은 수준에 머물러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오히려 일반인들의 인식은 점차 향상되고 있는 추세임에 반해 행정당국과 언론의 태도는 시대흐름에 오히려 역행하고 있는 느낌이다.
<애기섬>에 대한 <월간조선>의 태도에서 볼 수 있듯이 영화 작품의 내적 구조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 외적인 조건을 문제삼는 비문화적인 태도가 아직도 우리 언론에 만연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등급보류제도 위헌판결 이후 관련 법제도와 기구를 개혁하는 것 못지 않게 사회 전반의 인식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 활동이 절실한 과제임을 보여주고 있다.
완전등급제가 도입되는 등의 법제의 변화가 수반된다 하더라도, 행정당국, 언론 등 사회 일반의 영화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지 않는 한 제도의 적용마저 혼선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단체의 한 관계자는 "<애기섬>을 영화 작품으로 보지 않고, 사회 일반의 그릇된 통념으로 재단하고 들어가려는 전반적 인식이 문제"라며, (현 상황에서는)"이 영화를 영화 미학적 관점에서 시나리오, 내러티브, 기법 등을 기준으로 봐 줄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여순사건을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 이런 표현도 가능하구나'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열린 자세가 아쉬운 것"이라고 꼬집었다.
예술작품을 이념적 틀이나 특정한 도덕률 속에 가두고 재단해서 검열을 강요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이다.
2001/09/21 오후 8:3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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