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또 하나의 깃발: 다시 싸움이 있었다.
제2회 울산인권영화제에서 상영예정이던 ‘라넷’(LARNET, Labor
Reporter’s Network)의 「밥·꽃·양」의 사전 검열 문제를 둘러싸고 사이버 공간의 논쟁이 뜨거웠다. 9월 초에 시작되어 10월을 넘기면서까지 아직도 진행중인 이 논쟁은 한국 사회의 이념적 지형의 일단을 잘 드러낸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것은 자본과 노동, 독재와 민주, 제국과 민족 같은 이분법으로 현실을 재단하는 것이 허구일 뿐만 아니라, 해방의 이름으로 또 다른 억압을 은폐하는 기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밥·꽃·양」은 1998년 현대자동차 파업 당시 노·사·정 합의 아래 정리 해고된 144명의 현대자동차 식당의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영상 보고서이다. 사건의 전말에 대한 장황한 보고는 생략한다. 사태의 핵심은 정리 해고의 칼날이 현대자동차 노동 현장의 주변인, 주변의 주변인 식당의 밥하는 아줌마들, 즉 여성 노동자에게 겨누어졌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들의 투쟁은 노동 유연성을 관철시키려는 자본뿐만 아니라 현대자동차 노조 지도부의 남성 국수주의라는 이중의 전선에서 펼쳐질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투쟁을 다룬 영상 보고서인 「밥·꽃·양」이 울산 인권영화제의 상영작으로 추천된 것은 극히 합당한 결정이었다고 판단된다. 그런데 갑자기 영화제 개막을 얼마 앞두고 「밥·꽃·양」의 상영 여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고, 영화제 주최측은 이에 대한 사전 심의를 최종 결정의 전제로 제시하였다.
영화제 주최측의 의도가 무엇이든, 그것은 ‘사전 검열’이라는 의혹을 살 만한 결정이었다. 당사자인 ‘라넷’의 반발은 당연했고, ‘인권영화제’의 사전 검열에 대한 논란이 없었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볼 때, 더 큰 문제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래 비약적으로 발전해 온 한국의 노동 운동이 가진 헤게모니적 성격이다.
‘자본과 노동’의 이분법에서, 현대자동차 노조와 같은 대기업 노조가 주도해 온 노동 운동은 물론 해방의 운동이었다. 그것이 평범한 노동자들의 절절한 염원을 담고자 노력했다는 것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해방의 운동 안에서 또 다른 권력 혹은 헤게모니를 지향하는 싹이 자라고 있었다는 사실도 부정하기 어렵다. 그것은 단지 ‘노동 해방’의 깃발 아래 감추어졌을 뿐이다.
은폐된 억압의 실체는 「밥·꽃·양」과 같은 소재를 다룬 「평행선」 상영에 대해 현대자동차 노조가 보여준 태도에서 이미 잘 드러난 바 있다. 그에 대한 현대자동차 노조의 항의와 반발은 이들 대기업의 남성 노동자들이 지향하는 ‘해방’에서 여성 노동자는 배제되었거나 혹은 경시되었다는 이면의 현실을 잘 드러내 준다.
결국 「밥·꽃·양」에 대한 사전 검열의 문제는 해방 운동으로서의 노동 운동의 이면에 숨어 있는 남성 국수주의의 억압 구조를 드러내는 계기로서 작동한 것이다. 사실 검열 논란에 앞서 이미 「평행선」은 이들 노조 지도부에 의해 배제되고 거부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자동차 노조 지도부나 평범한 남성 노동자를 비난하는 것이 논의의 초점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일상의 소소한 욕망을 접고 보편적 해방과 혁명에 헌신하는 노동자는 엘리트 좌파 지식인들이 만든 이론적 노동자일 뿐 현실의 노동자는 아닌 것이다. 현대자동차의 남성 노동자들이 보편적 해방의 대의를 저버렸다고 비판하는 것은 이론의 노동자의 이름으로 현실의 노동자를 전유하는 행위일 뿐이다.
노동자들의 현실적 삶은 국가 권력을 거부하는 자율적 일상 세계와 권력이 만든 내적 식민지의 경계를 넘나드는 유동적인 것이다. 이 유동성이야말로 평범한 노동자들이 세계를 전유하는 현실의 방식이며, 좌파 지식인들이 만든 이론적 노동자의 규범적 행위 양식과 다른 것은 당연하다.
이 사건이 현대자동차 노조 지도부나 남성 노동자들의 실존적인 문제를 건드리는 방식이 아니라, 담론적 실천의 관점에서 분석되어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담론적 실천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한국의 진보적 노동 운동을 추동해 온 마르크스주의에 내장된 20세기적 해방의 이론적 한계이기도 했다. 20세기의 역사가 증명했듯이, 계급 해방이 성·민족·인종·동성애 등 다양한 국면의 모든 억압들을 자동적으로 해소할 것이라는 확신은 분명 잘못된 것이었다.
계급 모순으로 환원되기에는 현실의 모순 구조가 지나치게 중층적이고 복합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진보적 노동 운동이 수용한 마르크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 유일주의’나 토대와 계급으로 환원되는 철학적 본질주의의 유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여성, 농민, 소수 민족 등을 노동 운동의 이해에 종속시키고 보편 계급의 이름으로 이들을 전유하고 타자화함으로써, 지배 민족/인종의 남성 노동자 헤게모니를 정당화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적 패러다임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노동 해방은 자본 대 노동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이 아니라, 남성 대 여성, 지배 민족 대 소수 민족, 정규직 노동자 대 비정규직 노동자 등의 다양한 층위에서 중층적으로 결정되는 문제인 것이다.
지금 요구되는 것은 한국의 진보적 노동 운동이 지향했던 해방이 사실상 ‘정규직·남성·한국인 노동자’의 제한된 해방은 아니었는가 하는 반성적 질문이다. 계급 해방의 슬로건이 이들 주류 노동자가 비정규직·여성·외국인 노동자라는 주변화된 소수를 배제하고 타자화하는 억압 구조를 은폐하지는 않았나 하는 솔직한 자기 반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것은 계급 해방을 형이상학적으로 고착화시키고, 그 밑에 여성 해방과 같은 다른 층위의 해방을 종속시켜 왔던 위계적이고 규율화된 해방의 패러다임에 대한 반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연대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비판적 연대를 향한 첫걸음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기 반성이 전제되지 않는 한 제2의 「밥·꽃·양」, 제2의 ‘대우캐리어’ 사태는 계속해서 발생할 것이다.
21세기의 담론적 실천은 ‘정규직·남성·한국인 노동자’의 위계적 해방에서 ‘비정규직·여성·외국인 노동자’ 등 주변화된 소수로 그 외연이 확대된 노동 해방, 그래서 자본과 노동의 위계뿐만 아니라 노동 내부에서도 중심과 주변의 위계를 무너뜨리는 노동 해방을 지향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