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의 운동을 생각하며, <밥, 꽃, 양>을 생각하며
서울퀴어영화제 조직위원장 / 프로그래머
서동진
(homopop@naver.com)

1. 불행히도 나는 아직 <밥, 꽃, 양>을 보지 못했다. 굳이 보겠다고 맘을 먹겠다면
인터넷을 통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제대로 볼 기회를 누리며 보아야 겠다는 완강한 고집을
꺾기가 싫었었다. 이번에 걸음 한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밥, 꽃, 양>을 상영하는
특별한 행사가 다른 곳에서 열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그러나 일정이 넉넉지 않은 탓에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오며 다른 아는 이들에게 그것을 보고 오도록 당부하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벌써
여러 자리에서 <밥, 꽃, 양>의 상영 ‘금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서도 그를
직접 대면할 기회를 미루는 것이 영 찜찜하다. 그러나 그래도 그 찜찜함을 견디려 한다. 나는
<밥, 꽃, 양>을 운동 진영 내부의 검열에 의해 상영이 금지된 작품으로, 진보적
집단 내부의 보수적인 기득권적 태도의 희생양으로 보기를 원치 않는다. 그 작품의 상영을 금지한
이들이 느꼈던 당혹과 충격을 그대로 우리 모두 느끼며 그 작품이 보여지길 원한다. 그 작품을
다른 이들과 함께 공공연하게 보게 되었을 때 그 상영을 금지한 자들이 예상했던 그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지켜보며 그 작품이 상영되길 기대한다. 그 어떤 집단보다 더 윤리적이고 정의로워야할 진보 집단에서
이런 후안무치한 일이 벌어지다니 식의 느슨한 윤리적 강박관념은 <밥, 꽃, 양> 사건을
바라보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될 게 없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2. <밥, 꽃, 양>은 90년대 이후 사회운동의 어떤 흐름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바로 반대의 운동과 차이의 운동 사이에 가로놓여있는 섬세한 차이이다. <밥, 꽃, 양>의
식당 아줌마를 보는 시선은 대개 이런 가정에 서기 쉽다. 못 가진 자 가운데 더 못 가진 자,
업신여김 당한 자들 가운데서 더 업신여김 당한 자, 억압당한 자들 가운데서 더 억압당한 자.
그리고 그런 생각은 자꾸 흘러간 유행가 같은 말,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
따위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이런 생각에 기댈 때, 결론은 뻔하다. 없는 자들 사이의 또
다른 권력, 피억압자들 사이의 또 다른 복종과 지배, 그리고 그 가운데서 또 다시 이중의 지배에
희생당한 불쌍한 여성. 따라서 더 불쌍한, 더 희생당한 식당 아줌마들의 고통의 강도를 잊은,
그 노동귀족들의, 조직노동자들의 기회주의를 비난하라 ?!
그러나 <밥, 꽃, 양>의 식당 아줌마들은 과연 그런 희생자였을까. 고통의 강도가 더 센, 사회적 불행과 비참의 정도가 더 강한, 따라서 남성과 여성이란 차이는 사회적 권리라는 추상적 눈금에 의해 종류는 같지만 양적인 정도가 다른 정도의 그런 것이었을까. <밥, 꽃, 양>의 식당 아줌마들에게 있어 식당 아줌마란 위치는 그리고 그 중에서도 문제가 되는 “성별의 차이”는 사회적 불행의 정도를 가리키는 그런 지표에 불과한 것일까. 우리는 그런 생각에 맞서 단호히 “아니오”라고 답할 수 있다.
3. 식당 아줌마는 기존의 조직화된 노동자 운동의 논리로 볼 때, 미조직된 비정규 노동자이거나
유효한 생산과정과는 구분되는 부수적인 노동에 종사하는 경계선 상의 노동자일 뿐이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을 생각할 때 그녀들의 노동은 노동조합의 힘이 비롯되는 직접적 생산과정과 별 관계가
없다. 그녀들은 바로 생산 라인에서 노동 시간의 조직과 통제를 둘러싸고, 노동생산물의 양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투쟁에서 무의미한 얼룩에 불과하다. 그녀들이 짓는 밥과 그녀들이 제공하는 노동은 직접적
생산 과정에 종속된 부차적이고 무시해도 좋은 노동이다. 따라서 그녀들의 노동을 자본의 착취를
보장하는 유용한 노동으로 적극 제기하지 못하는 한, 노동조합운동이 그런 노동에 대한 ‘특별한’
관념을 고수하는 한, 그녀들의 노동과 삶은 절대 보여질 수 없다. 그것은 87년 이후 너무나
아름다운 고속 성장을 한, 조직노동자운동 특히 노동조합운동이 자본가와의 싸움에서 빠져든 늪이며,
그런 점에서 이것은 어느 노동조합의 관료적인 이기주의가 초래한 도덕적 일탈이 아니라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한계를 보여주는 징후인 것이다.
4. 우리가 <밥, 꽃, 양> 사태에서 반성하고 주목하는 것은 검열을 흉내내는 우리의
나쁜 타성이 아니다. 그 타성은 검열이라는 정치적 테크닉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갖는
반자본에 대한 관념, 노동에 대한 관념 그리고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우리의 정치적 기획 속에
스며든 관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먼저 식당 아줌마의 노동을 다시 생각하기 위해 우리는 노동의
관념을 수정해야 하며, 생산관계에 대한 우리의 고집스런 편견을 바꿔내야 하며, 그런 생각에 깃든
남자의 노동에 대한 결벽증적 집착을 벗어 던져야 한다. 식당 아줌마들을 자본과의 타협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단순히 없는 자들끼리의 윤리적 공감을 무시하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리고 ‘만만한’
아줌마들을 흥정의 대상으로 제공하고, 정규 노동자들의 생존을 고수하려한 조합의 배신 때문만도
아니다. 그것은 아줌마들이 공장 식당에서 제공한 노동을 생각하는 자본의 태도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우리의 조합주의적 신화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 조합주의는 이성애자-남성-가족을 배경으로
해서만 노동을 생각하는 버릇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속에서 식당 아줌마들은 그녀들의
구체적 노동과 구체적 차이에서 생각되지 않고 노동조합운동이 생각하는 노동의 법 속에서 생각될
뿐이다.
5. 그러나 언제나 투쟁과 저항은 그런 관념의 탄생을 앞선다. 결국 식당 아줌마들은 투쟁했고,
그녀들의 투쟁이 왜 그토록 ‘강철같은’ 노동조합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것은
아주 단순한 물음을 실어 나르는 투쟁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자라서?”, “그러니까, 우리가
당신네들이 생각하는 그런 시시한 밥이나 짓는다고?”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여자이고 밥이며, 그것은
공장의 담장을 넘어서는 문제이다. 이것은 <밥, 꽃, 양> 사건을 보며 노혜경 시인이
정확하게 고발하였듯이, 바로 식당 아줌마들을 이혼의 위협으로 몰고까지 한 노동자 남편에게 제공해야하는
섹스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식당 아줌마들의 생생한 현실을 읽어들일 논리를 갖지
못하고 있다. 즉 우리가 자본의 논리에 맞서 들이밀 노동의 논리, 즉 반자본의 논리가 부실하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식당 아줌마들은 “같이 없이 사는 처지끼리 니네가 이럴 수 있어“라고 얘기한
것이 아니라, 아니 ”왜 내가 사는 인생은 안중에도 없고, 왜 노동조합운동이란 건 그런 인생살이에
대하여 할 이야기가 없는 거야“라고 묻는 것이다. 그 때 그녀들의 물음은 바로 차이이다. 혹은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반대(opposition)의 운동은 자본과 노동의 대립은 세계를 생각하는
논리를 공유할 때, 즉 세계를 생각하는 방식에 동의할 때 생겨난다. 차이(dissent)의 운동은
그런 논리와 세계가 있을 수 없다는 발상에서 시작한다. 식당 아줌마들의 투쟁은 그런 점에서 차이의
운동이다.
6. 식당 아줌마들의 투쟁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존의 노동조합운동이 오직 생산 라인 안에서 벌어지는
남자들의 근육의 노동을 숭배할 때 결국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자신의 ‘진한’ 인생을,
노동을, 고통을 생각하라는 요구이다. 대관절 내 삶은 뭐냐고 따지는 것이다. 그러니 제발 <밥,
꽃, 양> 사건을 표현의 자유의 문제로 보지 말자. 그것은 우리가 다른 삶을, 매일 마주하고
산 식당 아줌마들의 인생을 노동의 이름 위에서 다시 생각하기 위한 시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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