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혜경님의 글에 대한 반박으로 서준식 선생님과 제가 개인적으로 주고받은 편지가 공개적으로 해석되고 증언된다는 데에 설명할 수 없는 절망감을 느낍니다. 저는 서준식 선생님에게 피해를 호소하지도 긴급한 보호를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인권운동사랑방을 피해 접수처로, 피해자의 자리에서 서준식 선생님을 상담원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검열 행위에 분노하며 내린 결단을 알려드리고 조언을 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평행선은 2000년 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되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저나름대로 친근감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평행선을 만들고 상영하면서 겪었던 심리적 불안감과 위축, 결국 거대 노조의 힘에 굴복해 싸우지 못했던 좌절감, 제 작품에 등장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시달렸던 제가 다시 작업을 하게 되었고 그 작업의 결과를 선생님께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8월 25일 한국여성연구소 상영회 때 영상보고서를 보러 오십사 메일을 보냈고 선생님은 평행선의 인연을 기억하시며 관심을 표하는 메일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런 일들로 저는 서준식 선생님께 이번 사건에 대한 조언을 스스럼없이 구하는 용기를 가지게 됐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보낸 편지가 서준식 선생님을 통해서도 아니고
인권운동사랑방의 조사를 위한 입장의 근거가 되는 사실 앞에서
저는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인권운동사랑방이 라넷의 불분명한 대목이라는 근거로 제시한 제 편지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서준식 선생님께 보낸 편지에서 이 사건이 발생한 경위의 일부를 말씀드렸습니다.
프로그래머로부터 현대자동차 노조에서 문제 제기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전달받았고, 저는 그 전달받은 사실들을 편지에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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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울산인권영화제에서 상영을 하기로 했습니다.
영화제를 염두해두고 만든 작품이 아니긴 했지만 인권영화제이기에
이런 염두를 잠시 접어놓고 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 할 수 있는 자리라는
생각에 상영을 하기로 했습니다.
프로그래머를 통해 상영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마친 상태에서
울산인권영화제 측에서 이 영화에 대해 현대자동차 노조에서 문제제기가
들어왔다. 그러니 영화를 사전에 보고 논의해야겠다는 말을,
이런 이야기가 집행위원회에서 결정됐다라는 내용을 프로그래머에게서
통보받았습니다.
프로그래머는 이미 결정된 영화인데 지금에 와서 그 이야기를 감독들에게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라고 항의했지만 집행위 결정이 철회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몹시 망설였고 솔직히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평행선을 통해 수많은 협박도 받아받지만 이번처럼 황당하지는 않았거든요.
그래서 저희는 이건 인권영화제 정신에 어긋나는거 아니냐,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인권영화제이고 이것은 한국에서 독립영화를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소중한 것이다. 당신들이 인권영화제의 이름을 빌어
현대자동차 노조에서 외압이 들어왔다고 작품을 보고 논의하자는 말을 할 수는
없다. 이건 명백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미 확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또다시 이 작품은 확정된 것이 아니다,
프로그래머가 혼선을 빚은 일이다. 자신들의 요구는 정당하다는 이야기를
집행위원장으로부터 듣게 되었습니다. 작품을 섭외하는 중에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고 프로그래머는 이미 이 영화를 봤다. 우리는 영화제에서 요구한 모든
절차를 밟았다고 했지만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힘들고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작품상영을 거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문제가 커져서 감당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도 들어 피해가고 싶었지만
언제까지 피해갈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몹시 혼란스럽고 두렵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편지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인권은 보편적 인권이다, 식당여성노동자들의 인권을 특화시켜
다수 활동가들의 인권이 보장받지 못한 작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들의 인권을 무참히 짓밟았다는 것입니다.
인권영화제라면 영화에 나온 소수자들과 그것을 담은 감독의 인권이
당연히 존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제가 큰 착오를 한것일까요?
그들은 어떤 구실을 삼아서라도 울산에서 이 영화가 상영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마음 같아선 그들은 이 영화를 땅에 파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희는 더더욱 이 영화가 울산에서 상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직도 정리해고의 상처로 많은 사람들이 가슴아파하고 있고 지금도 많은
사업장에서 진행이 되고 있는 문제이며 인간의 존엄과 생존이 달린 정리해고의
문제는 불편하고 어렵지만 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문제를 없는 것으로 덮을 수 없다는 진실 하나만이
몇 년간 이 작업을 하게 해준 원동력입니다.
평행선이 가져다준 좌절도 이 작업을 멈추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슬픔에 잠겨있습니다.
용기를 내어 선생님께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불쑥 이렇게 편지를 써도 되는걸까, 망설였습니다.
당신들이 만든 인권영화제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만든 것이다.
여기에서는 모두에게 환영받는 작품만을, 돈이 많이 들어가고 시나리오가 탄탄한
영화만을 상영하기 위해서 만든 영화가 아니다. 바로 인권이다, 인권..
이런 이야기가 목구멍까지 기어 올라왔지만 말할 의욕마저 잃어버렸습니다.
상영을 거부한 것이 인권영화제라는 이름에 누가 될까 걱정입니다.
더구나 영화를 하는 사람으로써 선생님이 어떤 시련을 겪었는지를
알기 때문에 더더욱 그 이름에 먹칠이 되지 않을까 고민도 들었습니다.
선생님을 개인적으론 잘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게는 큰 위안이
듭니다. 주제넘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노여워 마세요.
죄송합니다. 이런 내용을 편지로 쓰게 되어서. ............ "</font>
결국 이렇게 제 손으로 제 메일을 공개하게 만드는 상황이 저를 아주 처참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인권운동사랑방은 위의 편지와 저희들의 첫 번째 글 중에 나오는
"....출처도 명확히 밝히지 않은채 어떤 문제제기가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사전에 작품을 보고 상영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우리는 잠시 망연자실했습니다...."라는 내용 중 "출처도 명확히 밝히지 않은채 어떤 문제제기가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라는 부분과 저의 편지 내용과 대조하면서, 문제제기의 성격에 따라 검열이 안될 수도 있는 까닭에 라넷을 비롯한 여러단체에게 분명히 듣고 싶다고 합니다.
문제제기 시작부터 상영거부 날까지도 집행위는 여러 차례 사실들을 바꿔가며 문제 제기의 출처와 내용을 번복했습니다. 라넷은 그 문제 제기의 출처와 경위를 정확히 밝힐 것을 집행위에 요구하며 상영 거부를 알리는 첫 번째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 번복의 과정은 이후 라넷의 질문, 집행위 평등여성 경과글, 여성프로그래머 2인 입장글에서 각각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론 각자 제시하는 근거와 주장이 혼란스럽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가운데 각자 판단을 하는 것이겠지요. 출처를 여러번 바꾼 것도 사실이고 그 바꾸는 출처에 대해서 명확히 밝히라는 요구를 했을 뿐입니다.
서준식 선생님께 보낸 개인 편지, 그리고 더도말고 덜도 말고 프로그래머를 포함한 집행위로부터 들은 여러 가지 말들에 대해서 납득할만한 출처와 내용을 밝히라는 입장글, 이 둘을 결합시켜 인권사랑방이 불분명한 생각을 가지게 된 한 예로 제시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좀더 명료하고 단순하게 설명해줄수는 없는지요?
인권운동사랑방이 하고 싶은 말은
제가 선생님께 쓴 편지에서는 라넷이 외압의 실체를 알고 있었으면서
상영을 거부하는 글에서는 외압을 모른 척 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의미입니까?
필요한 대목에만 시선을 집중시키고
자신의 판단을 이야기하는 인권운동사랑방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쓴 편지는 논리적인 편지도 문제 제기에 대한 반박의 편지도
이 사건에 공식적으로 개입해달라는 요구의 편지도 아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보낸 편지가 다른 사람들에게 의해 마구잡이로 공개되어
의혹의 근거 자료로 제시되는 상황 앞에서 몹시 당혹스러울 뿐입니다.
행여나 개인의 절박한 감정까지 분석하려들지는 않겠지요.
저의 진심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채, 인권운동사랑방이
"너무도 많은 것들이 불분명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의심을 더해주는 구실만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으로 그 편지를 읽게되었는지, 답답하고 서글플 뿐입니다. 혹시 서준식 선생님께서 이 글을 보시게 된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제 편지를 다시 한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저의 느낌과 생각을 말씀드렸고, 주제넘게도 조언을 구했을 뿐입니다. 선생님이 부담을 갖게될까 편지는 그만 쓰겠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세 번째 편지를 끝맺었습니다. 선생님이 공인이라는 생각보다는 연대와 존경의 감정을 나누고 싶은 개인으로 느꼈던 저의 미숙함을 처절하게 뉘우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2001년 10월 29일 서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