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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밥꽃양 - 반복과 한숨, 그리고 눈물 / 그림자춤
언니네 > 자기만의 방 > 먼지털이, 에서 퍼왔습니다.
비공개 게시판인데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림자춤 님이 쓰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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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밥꽃양 - 반복과 한숨, 그리고 눈물 </b> 2002년 4월 4일
3월 30일 밥꽃양을 드디어 봤어. 대규모 상영은 마지막일 거라고 그러더군. 이화삼성관으로 걸음을 재촉하던 길에 비가 부슬부슬 왔어.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길을 걸었어. 들어가 보니 자리가 꽉 차 있었어. '노동운동은 그런 것 아닙니다' 라는 말을 듣는 순간 무섭게 울고 말았지.
사실 난 보기도 전에 그 내용에 대해서 대충 알고 있었어. 울산 현대자동차의 합의된 정리해고 속에서 처음부터 희생물로 선정된 식당조합원 아주머니들.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파업 속에서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투쟁에 임하고, 파업하는 사람들에게 밥을 지어 먹였지만 처음부터 짜여진 각본 속에서 벗어날 수 없었어. 시간이 흐르고 회사 경영상태가 좋아지자 그들은 노동조합 하청업체라는 위치에서 벗어나 정규직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에 들어섰지만 아무도 그들의 투쟁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어. 그녀들의 투쟁에 아무런 관심 없이 단지 지도부와의 합의를 말하고, 약속된 시간을 말하며, 병원으로 실려 가는 아주머니들을 둘러싸는 노조집행부 사람들. 결국 그녀들의 단식 천막은 뜯겨나가고 투쟁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어.
밥꽃양을 보다보면 한숨이 저절로 나와.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 노동조합의 권위주의, 여성억압적인 가족주의, 재생산 노동에 대한 비하 등등 모든 대상을 향해 싸움을 걸어야 하는 현실의 막막함에 대해서, 그리고 그간 그녀들에 대해서 알지 못한 답답함 때문에.
>>합의와 논의, 그 합리적인 권력의 반복되는 짓거리
식당조합원 아주머니들은 두 번 속아. 한번은 정부와 노조지도부가 '노사정 위원회' 속에서 상황의 절박함과 합리적인 설명, 보상을 말하는 노조위원장에게. 또 한번은 복직 투쟁과정에서 충분한 논의'와 '의사결정'을 말하는 노조지도부사람들에게. 그녀들은 말을 제대로 못해. 왜냐하면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분명 그들의 말이 옳거든. 논의를 하고, 합의를 한 결과 가장 좋은 결과가 산출되는 거잖아. 그런데, 그런데 만일 그 논의와 합의가 미리 짜여진 각본이었다면? '식당'을 목표로 이루어지는 수많은 정리해고 각본을 '합의'하기 위한 테이블이었다면?
생각했어. '합의'. '논의'. 정말 좋은 말이야. 그런데 그 합의와 논의를 이끄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동등한 위치에 서 있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 사실 조합원 아주머니들은 합의라는 것을 할 정도로 상황에 대해서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하는 위치에 서 있었어. 그녀들은 고통을 토로할 뿐, 합리적인 언어로 자신들의 상황을 설명하지 못해. 아니, 여러 명의 남성노조집행부들 앞에서 그녀들의 언어는 감정적인 한풀이 정도로 읽힐 뿐이야. 그건 분노스러운 현실 때문에 그렇지만, 식당조합원이라는 여성노동자의 위치를 설명하는 정확한 언어들이 없기 때문에 그렇기도 해. '여성'이고 '밥을 짓는다' 는 이유로 처음부터 희생양으로 정해지는 상황을 설명하는 언어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 그건 오로지 노사정 합의 테이블 위에서 존재하는 '합리적인' 이론이지. 지금 진보적인 이미지로 노풍을 일으킨 노무현씨, 밥꽃양에서 그 진보와 합의라는 이름의 기만을 철저하게 내보여. 거짓투성이 언론들의 카메라 세례 속에서 '아름다운 합의의 악수'를 내보이며, 웃음을 흘리는 그. 눈물을 기반으로 웃음이 생긴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어.
>>여성노동자, 가족과 노동에 얽힌 '여성'
현대자동차 파업기간동안 남성노동자들의 가족들은 함께 시위에 참여해. 그러나 여성노동자들의 가족은 아무도 오지 않아. 이유는 뭘까? 식당조합원들은 다들 십여년 동안 식당에서 일하면서 가정을 꾸려왔어. 그렇다면 시위에 참여하는 가족이 왜 없는 걸까?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서 감독이 말하기를 '파업기간동안 아주머니들의 집에 부인이 바람을 피운다 등의 소리를 해서 파업을 그만둔 여성노동자들이 많다'고 했어. 그게 한국의 현실이겠지. 성적으로 착취하는 남편, 자식의 교육비를 고스란히 대고 그것도 모자라서 자식을 현대에 입사시켜주겠다는 회사의 말에 정규직을 포기해야 하는 아주머니. 가족과 직장은 그녀에게 많은 노동을 요구해.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이야.
밥은 그냥 뚝닥 떨어지는 게 아닌데. 자동차 만드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노동이야. 몸을 지치게 하고 정신적으로 피로하게 만드는, 몸의 피곤함은 똑같은 노동. 단식을 결의하고 천막바닥에 드러눕는 아주머니들의 얼굴에는 삶의 피로가 고스란히 묻어있더군. 그 순간 많은 어머니들의 얼굴을 떠올렸어. 가사노동,비정규직, 주부라는 단어에 익숙한 그녀들.
>>비오는 공기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
지금의 노동시장이 우울한 건 다들 알고 있을 거야. 신자유주의, 노동시장의 유연화, 정리해고, 임시직의 증가 등등등. 그렇지만 밥꽃양이 이 시대의 우울한 자화상으로 떠오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신자유주의의 열풍 속에서 하청업체로 격하된 여성노동자 때문에? 대중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노동조합의 권위주의 때문에? 검열시도를 한 울산의 인권운동단체 때문에? 그 어느 곳도 충분한 대답을 해 줄 수 없어. 명확한 적은 보이지 않는데, 이리저리 두드려 맞은 꼴이지. 비오는 공기처럼 앞이 막막할 뿐. 그래서 그런 거겠지.
잘 모르겠어. 다가오는 메이데이를 생각하면서 행사를 준비해야 하는 지금에서도, 무엇을 어떻게 말하는 것이 그녀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길인지. 사실 가까이 갈 수 없는 길이 없는지도 모르지. 3년이 지난 다음에야 피땀흘려 만든 필름을 대규모 상영을 통해서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것이 표를 구한 사람들의 현실 아니겠어. 필름을 보면서도, 글을 쓰면서도 계속 자조하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