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노동자 영상보고서 - 밥.꽃.양] 제작팀 라넷(LARNET)
2001년
10월 중순 개최 예정이던 제2회 울산영화제가 지난 9월 19일 무기한 연기되었다. 『여성노동자 영상보고서 -
밥·꽃·양』의 사전검열 논란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더 이상 영화제를 강행할 수 없는 상태로까지 발전했기 때문이다.
『밥·꽃·양』은 98년
여름부터 2000년 1월까지 현대자동차 노조식당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담은 영화로서, 정리해고라는 테마를 통해 노동자의 생존과 존엄이 박탈당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추적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노혜경 시인의 말처럼 “저 갈라지고 쉬어터진 목소리들을 듣는 것은 그들의 말할
권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인간됨을 위한 가장 시급한 의무”라는 뜻에서 『밥·꽃·양』의 조속한 울산 상영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이 영화를 만든 라넷의 임인애, 서은주 감독, 홍은영 조감독과 이번 사태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어본다.
□『밥·꽃·양』의 제작 동기, 제작과정을 임인애 감독께서 말씀해 주세요.
저는 98년 8월 24일 밤,
그녀들의 울부짖음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날은 36일간의 정리해고 철폐투쟁이 끝나는 날이었습니다.
어둠이 내릴 무렵...
그녀들은 폐허가 되어버린 농성장 여기저기 몰려다니며 처절한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없어 더욱 적막했던 텅빈 공장의 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그녀들의 울음소리 고함소리는 무시당하고 상처받은 인간이 내지르는 절박한 육성이었습니다. 무엇이 그녀들을 저토록 울부짖게
만들었을까.. 그 물음으로 이 작품을 시작했습니다.
거대한 공장에서 소수로 존재하면서 밥을 하는 그녀들은 그 싸움 이후 노동조합에
고용된 하청노동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위치는 나이든 여성으로서, 대공장 남성노동자들을 사장으로 섬겨야 하는
하청노동자라는 신자유주의의 노동현실 이상의 복잡함이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그녀들의 사장단이 되어버린 남성노동자들과 동일한 조합원 자격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그 엉킨 실타래를 풀어가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한편의 완결된 영화로
만드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잘 짜여진 이야기구조로 전개되는 적당한 작품시간, 한 번 주욱 잘 보고 끝나는 잘 만든 영화, 객관적인 시각에서
기록되는 논평다큐멘터리 등으로 제작하는 것을 애초부터 포기하고, 퍼즐 조각같은 영상보고서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총 5시간 분량의
보고서들이 제작되었으며, 최후의 분량은 얼마가 될지 저희도 모릅니다. 이렇게 하나하나의 주제가 만들어지고 쌓일 때마다 크고 작은 영상토론회를
통하여 소통해왔습니다. 그 소통의 과정이 저희들의 제작과정이기도 했고 이 영상보고서가 완성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 9월
7일 라넷이 『밥·꽃·양』의 울산영화제 상영 거부 선언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7월말쯤 울산인권영화제 여성프로그래머로부터
상영 제의를 받아 상영을 수락했습니다. 감독과의 대화 등 상영을 위한 구체적 논의도 했고 상영후 토론회 참석자 섭외까지 진행된 상태라 들었는데,
9월 초 갑자기 울산인권영화제 측이 특정인이 등장하는 특정장면을 문제삼으면서 사전에 작품을 보고 상영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
특정인 때문에 작품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검열당해야 하는 셈이 되었지요. 다른 영화제도 아닌 표현의 자유를 위해 싸워온 인권영화제에서 외압
때문에 사전검열을 하겠다는 요구를 받아들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철회해달라고 요청하고 일주일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울산인권영화제 측은 계속 엉뚱한 이유를 덧붙이면서 사전에 작품을 보고 상영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영상
창작자로서 사전검열에 대해 유감을 표시할 수 있는 길은 저희가 상영을 거부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 라넷의 상영거부 선언 이후
울산영화제 집행위측은 『밥·꽃·양』에 대한 사전 검열을 한 바 없다는 요지의 주장을 밝히고 있는데, 이에 대한 라넷의
입장은?
구체적인 장면까지 밝히면서 사전검열을 시도해놓고 곧바로 상영료 문제를 꺼냈다가 식당 여성노동자들이 이 작품을 모른다고
했다가 기가 막혔어요. 식당 여성노동자들과 감독과의 관계는 영화제가 개입할 수 없는 문제이고 사실 노조식당 운영위와 작품도 같이 보고
운영위원장님과는 지속적인 논의도 하고 있었어요. 도덕적인 흠집을 내는 음모이거나, 영화제에 대한 기본개념조차 없는 행위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집행위는 사전 검열이 아니라 상영작 검토였다고 하더니, 그외 다양한 이유를 내세우다 급기야는 공식적인 섭외를 한 적도
없다고 하더군요. 어떤 영화제에서 상영작 섭외도 안 하고선 상영후 토론회 참석자 섭외를 하겠어요?
그동안 영화제 게시판에는 사전검열의
진상을 밝히라는 수많은 네티즌들의 의견과 여러 단체들의 입장이 올라왔어요.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집행위가 이번에는 문제제기자는 총괄
프로그래머이며, 문제제기 내용은 ‘노노갈등’, ‘개인의 프라이버시’, ‘영상자료 무단 도용’이었다는 입장을 발표했어요. 문제제기자가 총괄
프로그래머라는 주장은 이미 영화제 측이 한번 이야기했다가 총괄 프로그래머 자신이 부인하자 번복했던 것을 다시 발표한 것이고, 영상 자료 무단
도용 문제는 거짓말이라는 게 곧바로 드러났어요. 프라이버시 문제는 거짓말의 차원을 넘어서 최초의 문제제기자와 그외 다른 외압을 은폐하기 위한
비열한 행위라는 생각이 들어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이 프라이버시 문제를 거론하기까지 집행위와 외압의 공모과정도 저희들은 알고 있지만,
지면 관계상 이후에 다시 이야기하지요.
그래서 제작팀을 모욕하는 음해성 발언을 중단할 것, 문제제기의 실체와 경로를 구체적으로 밝힐 것
등을 재차 요구했어요.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울산영화제 측은 21일 밤 갑자기 사이트를 폐쇄해 버렸습니다.
□ 이번 울산영화제
사전 검열 사건 이전에도 이런 압력을 받으신 적이 있었나요?
이 작업에 후발로 참여한 서은주 감독의 『평행선』(서은주 이혜란
연출)이 상영될 때마다 현자 노조는 상영 중지를 요청했습니다. 심지어 노조식당 조합원들과 시사회를 할 때는 8대 집행간부들이 몰려와서 명예훼손
운운하면서 위협하기까지 했습니다.
99년 말 저희 라넷은 노조식당 운영위와 영상토론회를 가졌는데, 한 현자 현장조직이 특정장면에 대한
문제제기를 음성적으로 해왔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희는 상영회를 요청해서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라고 전했습니다. 또한 얼마 전 한국여성연구소
주최의 『밥?꽃?양』 영상토론회 후에도 현자노조 남성간부가 그 연구소로 누구 허락을 받고 상영을 하느냐며 협박성 전화를
했습니다.
□ 9월 21일 밤 울산영화제 홈페이지마저 폐쇄되어 의사 소통구조가 완전히 막힌 상태인데....
외압의
실체에 대한 네티즌들의 공방이 시작될 즈음, 이 영화제 게시판을 닫을 지 모른다는 추측을 했던 건 사실이에요. 그러나 추측이었을 뿐 설마
홈페이지 전체를 그렇게 급작스럽게 폐쇄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게시판 글들과 사이트 그림들을 백업해두긴 했지만
21일에 사이트 전체를 닫은 것을 보고는 정말 놀랐습니다. 집행위가 공청회를 제안하고 문제 제기 내용은 이거다라고 밝혔고, 그 내용에 대한
질문을 평등여성과 라넷이 던졌고.. 최소한 이런 상황들은 어쨌든 정리하고 그럴듯한 명분을 내걸고 닫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 뜻밖이었습니다.
누구는 “엽기적”이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폐쇄된 직후부터 22일까지는 미러 사이트 ‘검열영화제’
http://larnet.jinbo.net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앞으로 영상자료실에 영상보고서 클립들을 매일 업데이트할 예정입니다.
사전검열을 거부하는 적극적인 표현으로서 사이버시사회를 하는 거죠.
□ 울산의 많은 노동자들은 『밥·꽃·양』의 조속한 울산 상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라넷의 생각은?
생존의 목이 날라가야 하는 ‘정리해고’는 노동자들에게 너무나 크나큰 공포였습니다.
그래서 이 보고서는 노동자들의 물리적 심리적 기반을 해체해버린 공포 앞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정리해고라는 해법을
선택한 국가와 그 국가의 선택을 운신의 폭도 없이 강제받아야 했던 과정과,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서로다른 생각과 행동들, 선별과 배제가
이루어지는 관계의 그물망들, 그리고 노동자가 싸운다는 것, 힘없는 인간이 부당한 현실구조와 싸운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되새겨보는
작업이라 생각합니다. 적은 이제 모습을 감추고 우리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이런 과정들을 주목하는 작업이 때로는 우리 모두를 혼란스럽게도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 영상보고서는 이런 이야기들을 위한 화두를 던지는 작은 시작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사자들에게는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들을 들추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화면 속에 있는 사람들이 소리칩니다. “우리들의 목소리를 세상과 만나게 해달라”고...
“우리들의 목소리가 시작된 바로 그 자리에서 재생시켜 달라”고...
편집시간 2001년 09월 25일 11:23 [울산노동자신문]